행동경제학
도모노 노리오 지음
이명희 옮김
이진용, 안서원 감수
지형
먼저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고민하고 있던 주제에 가장 명확한 답을 내준 책이다. 물론 아직 10개월이나 남았지만, 개인적으로는 2023년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큰 영감을 준 책이다. 2022년을 포함해도 가장 인상 깊은 책 중 하나이다. 이유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경제활동의 주체인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그리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동경제학도 주류경제학인가?', '경제학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비전공자인 내가 따로 답할 수는 없지만, 이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나왔으니 만큼 이 책에 나온 내용이 유사과학마냥 읽을 가치도 없는 비주류 서적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장점(?)
1. 인간이 항상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해야할지 행동경제학의 장점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존의 경제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중요한 전제를 반박하고 있다. 경제학원론 초반에 보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경제적인 인간'이라는 가정인데, 경제활동의 주체인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서 자신의 이해(利害)관계에 즉각반응하는 이기적인 존재이며 개인의 선호도가 명확한 존재로 가정한다. 이 가정하에 많은 경제적 원리를 설명하는데(물론 다른 가정도 많다) 행동경제학은 그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과연 항상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또는 '인간이 항상 즉각적으로 이익과 손실을 정확히 계산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저자는 유명한 행동경제학 실험 몇 가지를 예시로 들며 주류경제학의 중요한 가정이 항상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책에도 나온, 아마 인터넷에서 언젠가 보았을 유명한 실험을 몇 가지 나열해보자.
먼저 그 유명한 몬티 홀 딜레마다. 책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보자.
지금 여러분은 TV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고 가정한다. 몇 문제를 풀고 마지막으로 상금을 획득할 기회가 찾아왔다. 문이 3개 있고, 자기가 선택한 문을 열면 그 뒤에 있는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오직 1개 문 뒤에만 자동차가 놓여 있고, 나머지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문 A, B, C 3개 중에서 추측으로 A문을 선택했다고 하자. 아직 문은 열리지 않은 상태다. 이때 자동차가 놓인 문을 알고 있는 사회자가 C문을 열었다. 물론 거기에는 염소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사회자가 여러분에게 물었다.
'A문으로 결정하셨습니까? B문으로 바꿔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여러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 선택대로 A문으로 할 것인지, 아직 열리지 않은 B문으로 바꿀 것인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p. 26)
정답과 해설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 한 번 찾아보길 바란다.
다음으로 프레이밍 효과에 관한 '아시아의 질병 문제'이다.
질문1. 미국 정부는 아시아에서 발생한 희귀병으로 600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 질병을 박멸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두 가지 프로그램이 물망에 올랐다.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이 병의 생사에 대한 확률은 과학적으로 정확하다. 다음 선택 대안에서 당신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A : 200명은 살린다. [72%]
B : 600명 모두가 살 수 있는 확률 1/3, 모두 살 수 없는 확률 2/3 [28%]
질문1'. (문제 설정은 위와 같다.)
C : 400명은 죽는다. [22%]
D : 모두 사망하지 않을 확률 1/3, 600명이 모두 사망할 확률 2/3 [78%] (p. 160)
사실 질문 1의 A와 C의 대답은 동일한 대답이다. B와 D역시 동일한 대답인데, 질문1은 긍정적, 질문1'은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실험참가자들의 선택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 실험이 말하는 결과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겠는가?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이 책에 나온 질문에 대한 답을 혼자서 상상하고 정답을 보면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 이건 내가 이성적인지 아닌지 시험하는 문제겠지? 풀어내버리겠어' 같은 마음을 먹었는데도 그랬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도 수많은 인간과 똑같이 너무 평범(?)했다.
사실 경제학에 큰 관심이 없어도, 행동경제학이 주류경제학의 어떤 점을 비판하는지와 같은 학문적 의의를 정확히는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은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때도 생각보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일 때가 많겠구나'와 같은 통찰만 얻어도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책에 나온 세부적인 사례들을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2. 효율적 시장가설에 적용하자면?
내가 이 책을 인상깊게 읽은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효율적 시장가설은 과연 틀렸는가? 효율적시장가설이 맞다면, 개별 기업 공부는 그다지 할 필요가 없다. 지수추종ETF만 열심히 사면 되기 때문이다(아니면 고배당주라거나). 그러나 효율적시장 가설이 틀렸거나 항상 작동하는 게 아니라면 개별 기업에 투자하는 게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직 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내가 깊이 공부해서 결론 내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심적으로는 효율적 시장가설이 꽤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류 학자들의 논쟁이 완전히 허황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연 내가 기업분석에 시간을 많이 쓰면서 개별주 투자를 하는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주식시장이 그렇게 효율적으로 작동할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인간 개개인은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다. 주식시장에서 홀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개미들은 물론이고, 기관마저도 그 개개인의 총합일 뿐이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관이 인적, 물적 자원에서 우세하니 훨씬 더 합리적이진 하겠지만. 시장참여자는 모두 완벽하게 합리적이지는 않다. 또한 모두의 의사결정과정(주가산정공식 등)과 그 결과(예상 매매가, 기업가치)는 다르다. 주가는 출렁일 수 있어도, 기업가치는 이와는 별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주가가 기업가치를 따라간다고 보았을 때 냉철하게 기다리는 투자자라면 절호의 투자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적어도 누군가가 옆에서 효율적시장가설이 말이 되냐고 물어봤을 때 맞고 틀리다는 정성적 판단이 아닌 '꽤나 맞다'는 정량적인 표현을 하고 싶다. 적어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노이즈일 수도 있는 정보나,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에 큰 영향이 없을 정보에 주가가 흔들리는 걸 보면 완전히 맞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진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김에 기본투자론(링크)를 꺼내서 효율적 시장가설 편을 다시 읽었는데 행동경제학을 한 번 읽고 보니 더 잘 이해가 되긴했다. 어찌됐든 아직까지 효율적시장가설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시장에는 많은 이례현상이 있으며 빈틈이 많으니 개별 투자를 해도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3. 번역과 문장이 매끄럽다.
가끔 이런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는 책을 읽으면 여러 용어가 통일되지 않거나, 어색한 맥락이 발견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읽는 내내 문장 구성이 깔끔해서 심적으로 편하게 읽었다. 아무튼 책의 구성도 깔끔해서 목차만 봐도 어떤 식으로 책이 진행될지 알 수 있었고 문단 구조도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바 역시 비교적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단점
1. 배경지식, 맥락이 필요하다.
먼저 경제학을 알고 보는 게 좋아보인다. 책은 쉽게 씌여졌지만, 경제학의 기본을 전혀 모른다면 이 책이 주류 경제학의 어떤 점을 비판하는지, 이 분야에서 맥락상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위 문단에서 번역과 문장이 매끄럽다고 했는데 이런 배경지식이 없다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엥? 갑자기 이말을 왜하는거지?'처럼).
물론 꾹 참고 읽는다면 저자가 뭘 주장하는지 알 수는 있겠지만, 보통의 다른 심리학서적을 읽은 것과 비슷한('역시 인간은 비합리적이구만~')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또한 행동경제학 내용 자체가 어려운 점도 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론이 엄밀한 논증을 바탕으로 쌓여있어서, 경제학원론 같은 교과서를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다(물 어렵고 난해하긴 하다). 신문을 읽으면 경제 코너를 얼추 이해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 책은 읽어도 행동경제학을 과연 어떻게 실생활에서 적용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또는 정량화)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학자들 간에도 이 점이 문제라고 한다. 주류경제학의 반론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그 빈틈을 행동경제학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실생활에선 "넌 지금 프레이밍 효과 때문에 이걸 선호하는거야, 이건 비이성적이지!"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정도는 그냥 심리학에서도 이야기하는 수준이고, "앞으로 이런 효과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 책을 읽은 걸로 평가하자면 아직 행동경제학이 이 경지에 이르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 서술이 집약적이다.
문장은 정말 깔끔하다. 문제는 논거로 쓰이는 실험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도식을 좀 더 많이 사용해주면 좋은데 글 뿐이다. 글상자로 문항과 결과를 서술해놓고, 저자가 긴 줄글로 해설해놓아 실험을 이해하다가 힘이 빠지는 경우가 좀 있었다. 사실 다 읽고도 이해 못한 실험도 있었다.
문제 3. 다음과 같은 카드 4장이 있고 앞에는 알파벳이, 뒤에는 숫자가 적혀 있다. 현재 '모음이 적혀 있는 카드 뒤에는 짝수가 적혀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느 카드의 반대쪽 면을 확인해야 할까?
ⓔ ⓚ ④ ⑦
p. 27
이 실험을 보고선 내가 멍청해서 이해를 못한건지 이해를 못하는게 당연한건지 문장이 이상한 건지 이해를 못했다(물론 내가 선택한 답도 틀렸다). 아무튼 글로만 꽉 차 있으니 머리가 잠깐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읽다가 쉬다가(=딴짓)를 반복했다. 사실 설명 문장 자체가 난해하진 않았지만 실험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중해서 생각하다보니 오랫동안 읽기가 쉽진 않았다. 실험의 결과는 사뭇 놀라운 게 많은데, 좀 더 읽기 편하게 하면 훨씬 더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전면개정판이 나오면 분량이 조금 늘어나더라도 문제 이해가 좀 더 쉽게 상세히 실험과 결과를 설명해주면 좋겠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에게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다 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책 제목자체가 '행동경제학'이라는 고리타분한 제목 때문이었는데 사실 행동경제학에 관한 책은 이 책 말고도 많다. 그 유명한 리차드 탈러의 『행도경제학』,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 더 유명한 책인 것 같다. 사실 대니얼 카너먼의 책은 제목을 보니 행동경제학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닐 것 같아서, 리차드 탈러의 책은 내가 예전에 이미 『넛지』를 읽어서 다른 저자의 책을 골라보려고 이 책을 선택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의 두 책도 읽어보려고 한다.
만약 경제학원론같은 경제개론서를 한 번 읽어본 사람이라면 꼭 추천한다. 다만 경제에 문외한이라면 책은 좋음에도 내용이 쉽지 않으므로 차라리 다른 심리학자들이 쓴 심리서적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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