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증, 졸음에 대한 모든 것
신홍범 지음
이담 (한국학술정보(주))
사실 이 책은 이번에 잘 못 산 책이다(이전에 한번 사볼까 생각하다가 안 산 책이긴 했다). 요즘 잠을 편히 잘 못 잔다는 느낌이 들어서 수면위생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 인터넷 서점으로 고를 때는 분명히 『기면증, 불면에 대한 모든 것』, 으로 보여서 '기면증과 그 반대인 불면에 관한 책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만, 막상 받아보니 『기면증, 졸음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면증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책이었다. 이것마저 잘 못 본걸 보니 확실히 잠을 잘 못자나보다.
배송받고 표지를 보면 잠깐 허탈해있다가, 두께를 보니 생각보다 얇기도 하고 몇년 전에 기면증인지 걱정되서 병원도 가봤던 만큼(저자가 대표로 있는 병원이다) 읽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후다닥 읽었다. 두께가 얇은만큼 읽어나가는 속도도 빨랐는데 다 읽고 나니 우연히도 좋은 책을 잘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나열해보면, 우선 내용이 '기면증' 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 시중에 잠에 관한 책이 몇 권 있으나 대개 수면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에 그치고, 기면증은 짧게 한 두 단원 정도로 이야기한다. 대중을 위한 기면증 서적은 2023년 현재까지 이 책말고는 없다. 이 책은 기면증이라는 질병 한가지만을 주제로 한다. 사실 내가 처음 불면증 서적을 고르면서 원하던 내용은 수면위생 같은 수면의 일반론적인 내용이었는데 이 책에는 굳이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저 '양질의 수면을 포함한 건강한 생활패턴을 유지하면 기면증 증상도 한결 나아진다'정도의 수준의 수면위생 언급 정도만 있을 정도다. 아마 기면증 환자에겐 수면위생을 아무리 잘 지켜도 기면증이 완치되기 어려운 생리학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수면부족이 기면증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주제에 집중했다.
가끔 일간신문의 건강란에 기면증에 관한 설명이 잠깐씩 나올 때가 있지만, 그럴 때는 대개 5분이면 다 읽을 정도의 분량으로, 기면증이 어떤 증상이나 위험을 지닌 질환인지 대략은 알아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은 150쪽 정도가 거의다 기면증의 원인, 증상, 치료와 관련된 내용이라 기면증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독자를 고려한 적절한 난이도과 문장력이다. 대개 이 책을 집을 사람은 자녀의 기면증이 걱정인 부모, 또는 기면증으로 고생하는 본인일 가능성이 높은데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의학적 지식을 일반인이 읽기에도 문제 없을 정도로 쉽게 서술했다. 기면증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하이포크레틴이나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설명도 너무 깊지 않고 이해하기 쉽도록 서술했으며 약물 치료나 현재 새로운 치료동향을 간결하게 풀어냈다. 또한 기면증 환자들 치료 후기나 온라인 상담 내용도 함께 수록했는데, 나야 흥미로 읽었지만 정말 심한 기면증으로 걱정이 많을 어떤 독자에겐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문장이 자연스러운 점도 좋았다. 대개 이런 비인기 서적은 문장 서술이 어색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은 문장도 깔끔했고, 별 도움 안되는 일러스트도 최소화되어 있어서 상쾌하게 읽었다. 다만 평소에 -했습니다 체가 -이다 로 되어있는 부분을 보니 저자 본인 칼럼의 일부를 그대로 옮기고 편집을 덜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지는 않아서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만 더 꼼꼼히 교정했으면 더 좋았을 걸, 아쉬움이 든다.
책을 읽은 김에 책에 나온 기면증에 관한 몇가지 사실을 정리해보자.
1. 기면증은 심한 졸음(수면발작)이 특징인 질환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다. 큰 감정적 변화가 있을 때 근육의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과 입면기 환각, 수면 마비도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특이하게 일과 중에는 심한 졸음이 오다가도, 야간수면의 질은 저하되는 경우가 많아 밤에 잠을 안 자서 그렇다는 주변에서 오해가 잦다. 기면증은 대개 10대 때 증상이 처음 나타나고, 질병의 특성상 확진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아서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2. 기면증은, 질병의 특성상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르지만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뇌에서 하이포크레틴을 만드는 세포가 죽어서 하이포크레틴이 부족해지면 기면증이 생기는 것으로 추정한다. 하이포크레틴은 수면과 식욕을 조절하는 물질 중 하나로, 기면증 환자는 이 물질의 농도가 정상인에 비해서 낮다. 하이포크레틴 분비 세포가 죽는 유력한 이유는 자가면역질환인데, 이는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정상적인 세포를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하여 세포가 파괴되는 질환이다(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은 류마티스 관절염, 건선 등등). 또한 유전적 특성도 일부 있으며 기면증 환자 100명 중 1-2명 정도가 그런 것으로 파악한다. 기면증은 수면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의지나 집중력의 부족도 아니다. 카페인도 소용없다.
3. 기면증의 진단은 증상으로서는 심한 졸음을 먼저 평가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대개 졸음의 원인이 다른데 있다고 본인이나 가족이 착각하는 경우도 많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탈력발작, 수면마비, 입면기 환각 등을 평가하는데 이 증상들이 나타나지 않는 환자도 있다. 주간입면기반복검사로 뇌파, 안전도, 근전도 등을 파악하여 기면증을 확진한다. 졸음은 여러 변수가 많기 때문에 기면증인지 아닌지 애매한 경우도 있다.
4. 기면증의 완치는 어렵다(원인이 자가면역질환이고, 보통 발병사실을 늦게 알기 때문). 건강한 생활을 한다면 증상이 나아지긴 하겠지만 완치는 아니다. 한약이나 특정 약물, 수술법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즉 안 믿는 게 좋다. 현재 기면증은 약물치료로 꽤 좋은 경과가 있다. 심한 졸음에 대한 일차 치료제로 모다피닐(대표적인 상품명:프로비질)이 있다. 반감기가 길고 중독성, 내성이 없고 큰 부작용이 없다. 다만 두통, 고혈압, 예민해지거나 입마름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책에서는 R형 이성질체인 아모다피닐이 곧 나온다고 하는데, 2023년 현재는 국내에도 출시(누비질)되어있다. 또다른 치료제로 메틸페니데이트(콘서타)가 있는데, 작용 시간이 짧아(서방제형도있음) 중간의 졸음을 줄이는 데 많이 쓴다. 탈력발작은 렘수면의 특징인데 기면증 환자는 보통 렘수면이 바로 나타난다. 따라서 TCA(이미프라민, 프로트립틸린 등)나 SSRI, SNRI(심발타, 벤라팍신 등) 등을 쓴다. 책에는 GHB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에는 도저히 안나올 것 같다(굳이 나올 필요도 없을 것 같다).
5. 비약물치료는, 수면 패턴을 잘 유지하고 낮잠을 잘 활용해야 한다(하루 15분 이내). 운동을 꾸준히 하고 과식 등을 피해야 한다. 자가면역질환이므로 면역치료방법은 아직 많이 연구되지 않았고, 하이포크레틴을 주입하는 방법도 아직은 약물제제학적 문제가 남아있다. 유전자 치료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아직 연구가 지지부진한 걸로 보인다.
사실 책 내용이 적어서 이틀만에 후다닥 읽은 책이다. 내용은 적지만 적어도 '기면증' 내용 하나는 알차게 있으니 혹시나 기면증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초판이 2014년, 현재 판매중인 5쇄가 2019년에 나와서 2023년인 지금 시점과는 조금 다른 서술이 있을 수도 있으나(의료보험 정책이나 진단기준, 약값 관련) 큰 차이는 없을 것이고 궁금한 내용은 인터넷에 해당 키워드로 조금만 검색해봐도 쉽게 나오니 문제 없을 듯하다.
우연히 얻어 걸린 책인데 불면증에 관한 내용은 없다. 난 아쉽지만 다른 책을 또 찾아봐야겠다.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앞으로도 특정 질환에 대해 이렇게 얇고 쉽고 알찬 질환 관련 서적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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